말모이 이야기
영화 <말모이>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전과자 김판수가 생계를 위해 조선어학회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어학회의 사전 편찬 일을 얻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글을 전혀 모르던 그는 처음에는 억지로 일을 하지만, 아들을 통해 글자를 배우며 점차 한글과 우리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변화는 단순히 무지에서 깨우침으로 가는 개인적인 성장 서사를 넘어, 식민지 백성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류정환은 조선어학회의 책임자로, 김판수와는 사회적 지위와 교육 수준이 다르지만, ‘말’을 지켜내려는 사명 아래 함께 협력합니다. 영화는 이처럼 계층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한 뜻으로 모여 사명을 완수해 가는 과정을 진정성 있게 그립니다. 특히 실제 역사적 사건인 조선어학회 사건과 맞물리며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과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체포, 고문 장면은 사전 편찬 작업의 절박함을 극적으로 부각합니다.
<말모이>는 위대한 영웅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민중들이 힘을 모아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집단적 투쟁을 중심에 둡니다. 사전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말과 글’을 지킨다는 것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곧 삶과 정체성을 지키는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역사를 만든 위인이 바로 ‘우리 모두’였음을 깨닫게 하는 작품입니다.
관전포인트
영화 <말모이>의 진정한 감동은 단순한 역사적 줄거리에 머무르지 않고, 디테일한 연출과 인간적인 성장 서사에서 비롯됩니다. 주인공 김판수가 까막눈으로 시작해 글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후 자신의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려 애쓰는 모습은 단순히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을 넘어, 교육과 언어, 가족애의 중요성을 담아내며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진한 정서를 전달합니다. 영화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말모이’를 완성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단어를 수집하고, 그것을 목숨 걸고 기록하며 감추는 장면들을 통해 단어 하나하나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민족의 혼과 뿌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특히 극의 클라이맥스인 재판 장면은 조선어학회 인사들이 조선어의 가치를 외치며 신념을 굽히지 않는 장면으로, 영화 전체의 감정적 정점이 됩니다. 이 장면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지키려 한 이들의 처절한 저항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배우 유해진은 소시민 김판수를 진정성 있게 연기하며, 그의 서툴지만 따뜻한 성장 과정을 관객이 함께 느끼도록 만듭니다. 윤계상은 냉철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지식인 류정환을 담백하고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해, 두 인물이 서로 대조되면서도 결국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과정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줍니다.
또한 조명과 음악, 의상, 세트 등은 일제강점기 경성과 피난민들의 거친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극의 몰입감을 높입니다. 무엇보다 영화 곳곳에 스며 있는 유머와 감동의 조화는 관객이 부담 없이 역사와 마주하게 만들며, 웃음과 눈물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합니다. <말모이>는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삶과 정체성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섬세하게 전달하는 작품입니다.
역사
영화 <말모이>는 실존했던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과 1942년에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조선어학회는 1931년 이극로, 최현배 등 당대의 대표적인 언어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단체로, 조선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영화 제목이자 극 중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말모이’는 본래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서 국어사전 편찬을 시작하며 붙인 순우리말로, ‘말을 모은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 속 ‘말모이 노트’는 현재도 실존하는 유물이며, 당시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약 27만 개의 우리말 단어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이 단어들을 토대로 ‘큰사전’을 발간하려 했지만, 1942년 일제는 이를 민족주의 운동으로 간주하고 학회 관련자 33명을 체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 선생이 고문 끝에 순국했고, 권덕규, 김윤경, 김법린 등 주요 인사들이 혹독한 옥고를 치르며 사전 편찬 작업은 중단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영화 <말모이>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되, 극적 긴장과 감정 몰입을 위해 실제 인물 대신 창작 캐릭터를 배치했습니다. 류정환 캐릭터는 이극로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의 면모를 종합해 만들어졌으며, 주인공 김판수는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문맹이었던 당시 평범한 조선인들의 현실과 변화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철저한 역사적 고증 위에 허구적 서사를 더해, 관객들에게 역사의 무게를 전달함과 동시에 따뜻한 감동까지 선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