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는 영화계지만, 그 이면에서 여배우들은 여전히 주연, 투자, 연출의 벽에 막혀 있다. “여배우 단독 주연은 흥행이 어렵다”는 뿌리 깊은 편견은 시나리오를 바꾸고, 캐스팅을 뒤흔들며 여성 중심 영화의 출발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한국 영화계, 그리고 할리우드에까지 퍼져 있는 이 ‘유리천장’의 구조를 살펴보고, 이를 넘어선 여성 배우들과 창작자들의 노력을 조명한다.
주연 배우가 여성이면 투자가 망설여지는 현실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중심 서사가 가진 가장 큰 장벽은 여전히 ‘투자’입니다. 이는 단순히 영화의 질이나 흥행 가능성과는 별개의 문제로 작동합니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훌륭해도, 주연이 여성일 경우 투자 단계에서부터 수많은 제약에 부딪히는 것이 현재 영화 업계의 현실입니다. 많은 영화 제작자들과 배우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서사가 ‘시장성이 낮다’는 편견이 산업 전반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미씽〉에 출연했던 배우 엄지원 역시 이런 구조적 문제를 직접 경험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녀는 해당 작품이 공개되기 이전부터 시나리오 자체는 이미 업계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라서 투자자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왜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회상합니다. 이는 단순히 한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영화계 전반에 여성 중심 콘텐츠에 대한 신뢰 부족과 보수적인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여성 감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는 여전히 남성 감독이 안정적이고 흥행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뿌리 깊습니다. 이는 데이터나 실제 작품성과 상관없이, 단순히 산업 구조와 오래된 성별 고정관념에 기반한 인식입니다. 〈미씽〉의 제작을 맡은 메가박스 엠플러스는 여성 감독과의 작업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편견을 뚫고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결국 기존의 산업적 벽을 넘어서는 동력이었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주연 영화는 산업 내부에서 ‘모험적인 선택’ 혹은 ‘리스크가 큰 기획’으로 분류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단순히 한두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투자 구조, 배급 시장, 관객 타겟팅 전략에서 모두 여성 서사가 얼마나 취약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여성 중심 서사가 더 많이 제작되고 소비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좋은 시나리오나 연출력을 넘어, 영화 산업 전반의 인식 변화와 구조적 개선이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업계 종사자들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스스로 제작자가 되어야 살아남는 여배우들
여성 배우들이 중심에 선 영화는 작품성이나 메시지가 강하더라도 자본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몇몇 배우들은 직접 자본을 조달하거나, 제작 단계부터 참여하면서 작품을 성사시키고 있다. 김혜수는 영화 〈굿바이 싱글〉에서 철없는 40대 여배우 역할을 맡으며, 출산과 결혼에 대한 여성의 고민을 솔직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투자를 받기까지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 김혜수 소속사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화가 현실화될 수 있었다.
〈덕혜옹주〉 역시 주연 배우 손예진이 없었다면 개봉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삶을 다룬 시대극으로, 제작비와 고증, 세트 구성 등에서 고비용이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손예진은 이 영화를 지키기 위해 본인의 사비 10억 원을 투자했고, 영화는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성과를 냈다. 이러한 사례는 여성이 중심이 된 영화는 여배우의 의지와 헌신이 없이는 시작조차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 배우의 활동 범위를 좁히고, 결과적으로 성숙한 여성 서사, 비연애 중심의 여성 이야기들이 영화 시장에 진입하는 통로를 막는다. 배우 유인영은 〈여교사〉 제작발표회에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역할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단순히 작품 선택의 문제를 넘어 창작의 다양성이 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영화계의 ‘유리천장’, 단순한 인식 문제가 아님
한국 영화계는 매년 약 150편 안팎의 영화가 제작되지만, 그중에서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중심에 있고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현상은 단순히 관객의 수요 부족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 산업 내부의 구조적 문제, 즉 투자 구조, 제작진의 성비 불균형, 그리고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시각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입니다.
특히 투자 구조는 문제의 핵심입니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투자자 대부분은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제작 초기 단계부터 ‘무엇이 시장성이 있는가’에 대한 판단을 남성 중심적 기준에 따라 내립니다. 즉, 여성이 중심인 서사, 여성의 경험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는 ‘리스크가 크다’,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영화 산업에 뿌리내린 편견, 즉 “여자 배우로는 티켓 파워가 약하다”, “여성 서사는 한정적이다”라는 낡은 사고방식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미 흥행성과 작품성을 입증한 여성 배우들조차 이 구조 안에서 자립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여성 배우가 주연인 영화가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을 거두어도, 다음 프로젝트에서 동일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즉, 남성 배우는 흥행에 성공하면 곧바로 차기작이 줄지어 연결되지만, 여성 배우는 같은 결과를 내고도 다음 작품을 잡기 위해 훨씬 더 높은 벽을 넘어야 합니다. 이는 결국 여성 배우의 커리어 지속성을 심각하게 위협합니다.
여성 감독의 상황은 이보다 더 열악합니다. 연출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극히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연출을 맡게 되더라도 이후 마케팅, 배급, 상영관 확보 등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또한 여성 감독에게는 남성 감독에게 주어지는 ‘도전적인 시도’라는 프레임이 아닌, ‘모험적인 캐스팅’, ‘시장성이 불확실한 선택’이라는 불리한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한 번의 실패가 곧바로 커리어 단절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여성 감독들은 훨씬 더 높은 성과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영화계의 성별 불균형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누구의 이야기가 ‘가치 있는 서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직결됩니다. 구조적 장벽은 제작 단계부터 배급, 마케팅, 상영까지 전 과정에 걸쳐 존재하며, 이는 여성 중심 서사가 단순히 ‘비주류 콘텐츠’로 취급받는 것을 넘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서사’로 소외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선 단순히 여성 배우나 감독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투자 구조의 다변화, 제작진 내 성비 균형, 그리고 시장성과 작품성의 기준을 성별에 관계없이 재정립하는 산업적 변화가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성 중심 서사는 언제까지나 틈새 시장에 머물 것이며, 한국 영화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 역시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됩니다.
셀룰로이드 천장, 할리우드도 예외는 아님
이 같은 구조적 문제는 한국 영화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조차도 여성 영화인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셀룰로이드 천장(Celluloid Ceiling)’이라는 용어로 지칭합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처럼 여성 영화인들이 커리어 상 한계를 겪는 현실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으로 할리우드 배우 제니퍼 로렌스는 영화 〈아메리칸 허슬〉 출연 당시, 동료 남성 배우들보다 출연료가 현저히 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녀는 “까다로워 보이거나 욕심 많게 보일까 두려워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달했지만, 남성 배우들은 그런 걱정 없이 더 높은 출연료를 요구하고 받는다”며 업계 전반에 만연한 성별 임금 격차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녀의 이 발언은 이후 할리우드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여성 배우들의 임금 투명성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격차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할리우드에서도 여전히 여성 감독의 비율은 극히 낮으며, 여성 중심 서사를 다루는 영화는 ‘시장성이 불확실하다’, ‘모험적인 선택’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있습니다. 2020년 기준으로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전체의 10%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일부 여성 감독과 배우들은 기존의 편견을 깨며 상업적, 비평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영화 〈원더 우먼>, 〈노매드랜드>, 〈바비〉 등은 흥행과 작품성 모두를 인정받으며 여성 중심 영화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더디지만 분명히 진행 중이며, 영화 산업 내 성별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인식도 점점 확장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모두를 위한 영화가 필요할 때
한국 영화는 최근 몇 년 동안 장르적 다양성과 제작 규모 면에서 뚜렷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연간 관객 수는 1억 명을 꾸준히 넘어서고 있으며, 이제는 칸, 베니스, 아카데미와 같은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성장과는 달리, 여성 중심 영화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여배우가 주도하는 상업영화는 손에 꼽히고, 여성 감독의 작품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영화 관객의 절반 이상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관객이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서사, 인물, 세계관을 가진 영화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여성 서사는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존재들의 경험과 감정을 담아내는, 더 넓고 더 깊은 세계의 일부입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 더 다양한 시선이 담긴 서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작, 투자, 배급 전 과정에서 성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구조적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현재처럼 ‘여자 주연 영화는 리스크가 크다’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국 영화는 세계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반의 가능성만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진정한 도약은 이런 고질적인 관행이 깨지는 순간부터 시작될 것입니다.